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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권화(2)
검정, 어둠, 암흑, 칠흑, Black… 지금의 내 시야가 처해진 상황을 열거해보지만 이 이상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문장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지만 국어와 담을 쌓은 지 오래다… 아니, 그런 물고기가 있었나? 나로선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친구들에겐 지진아처럼 들리는, 마이 고유 패턴의 말장난이 터졌다. 나만 웃기는 개그. 내 안에서만 작렬하는 폭소. 내 안에서만 테트리스의 긴 막대기가 내리 꽂히는 쾌감. 혼자서 마지막 조각을 누르는 직소 퍼즐의 감촉.
그래… 나는 항상 혼자였다. 사춘기는 많은 또래들에 둘러싸여 혼자임을 절실하게 느끼는 시기가 아닌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나만… 이 어둠 속에 있는 듯 하다. 분명한 의식이 있다. 꿈은 아니다. 꿈이라면 ‘국어는 어류’라는 잭팟이 터질 리가 없다. 눈은 감고 있지 않다. 빛은 단서조차 없다. 섬세하고 농밀하게 머리의 회전과 심박 수는 증가하고… 심장은 뛰지 않는다. 이런… 보통 이럴 땐 식은땀, 진땀이 흐르거나 거친 숨을 뱉어내고 싶다던가 하고 싶지 않나? 자율신경계가 고장 나 버린 건가… 정신적 패닉으로 나 스스로가 무언가에 반응할 수 가 없게 되 버린 걸까, 아니면 이것이 제대로 된 반응인 걸까… 그 때…
펄럭-
아련히 느껴졌다. 12개의 움직임이. 물질과 물질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공허의 가로지름이.
검정보다 검은, 어둠보다 더욱 짙은 어둠 속을 회전하는 12개의 대형(隊形)의 몸짓을 시각적으로 소리로 해석해본다. 철학적인 건 좋아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표현은 내 스스로 강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가버려 타인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나는 그저 블랙홀을 마주 했다. 스케일은 그 정도로 컸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나름 객관성을 부여하자면 ‘아름답다’라고 내 뇌는 그 풍경을, 순간적이고 영원한 그 정보들을 해석했다. 모두 다 오류일 것이다. 꿈을 조각모음 해 봤자 깨기 전의, 그 말미의 윤곽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내 말은 다 거짓이며, 아름답다는 그 ‘기분’ 역시 오류에 불과한 내 찌꺼기 정의…
친.여.동.생.을.한.치.의.거.짓.없.이.진.심.으.로.사.랑.하.는, 나의 뇌는 애초부터 오작동의 산실이니까.
그 아름답고도 짙은... 검정, 암흑, 칠흑의 광채 속에서 12개의 물질은 움직임을 서서히 그치며 윤곽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했다. 내 뇌는 순간적으로 증폭해 더욱 많은 오류의 정보를 시냅스던지 혈관으로… 시속 따윈, 마하 따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내 육체의 구석구석으로 찔러 보냈다.
아…
침이 턱까지 흘렀고, 그 더러운 감촉에 나는 눈을 떴다. 빛을 감지하고 뜬 것이 아니라, 눈을 뜸으로서 빛을 감지했다. 붉은 빛이 때지어 달려가고 있다… 저녁인가…?
후루룩-
조건반사로 구강의 샘에서 분비된 무색의 끈기 있는 소화액을, 그 흐름을 끊는다는 의도로 나는 되감는다. 되감는다… 후루룩, 되감는다... 후룩, 결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삼킨다는 오류를 범할 리가 없잖은가. 뱉어내려고 결심했다가 다시 눈을 감고 졸아버려서 그것이 체내로 돌아간다든지, 새로 머금은 뉴타입의 소화액을 버무려 고체양산화 시킨다는 한심하고 추잡한 일은 여기엔 없다. 그런데… 다른 일은 있다. 아니, 다른 물체가 여기에 있다. 나와는 다른 타인이, 내 배 위에 탑승하고 있다. 승선표는 발행한 기억이 없다. 무임승선이다.
밀항자… 또는 해적인가…
으응…
눈을 비비는 동작을 취하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 밀항자, 해적은 나와는 다른 XX염색체의 사람이다. 마치 나의 이상형과 꼭 닮은 실루엣으로 밀항자, 해적은 내 배위에 머물러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와 접착되어있다. 나 역시 실오라기는 없다. 상체에만 한해서. 가로로 누운 나와 대비되는 세로로 앉은 XX의 사람은 마치 돛대와 같아 보인다. 돛 없는 돛대다. 가만, 머리 위에 뭔가 하나를 걸치고 있다. 쓰고 있는 듯, 얹어두고 있는 듯... XX사람의 머리 꼭대기에는 뾰족한 나선의 블랙홀이… 검정의, 암흑의, 칠흑의 광채를 가진… ‘뿔’이 달려 있었다.
으으응…
어느 초가을 공휴일, 늦은 오후…
비몽사몽간에 몇 번의 잠을 자고 그 몇 배의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 방, 내 침대 위에서 내 갑판 위에서 한껏 허리를 젖히고 기재개를 펴는… 돛 하나 걸치지 않는 나체의, XX염색체를 바라보며 내가 꾼 꿈속의 모든 조합이 실체화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미술시간에 어렴풋이 들었던 ‘상징적인 조각’이란 말이 거짓말처럼 와 닿았다.
확실한 것은 내가 꾼 꿈이건 지금의 실체건 모든 것은 오류일 것이다. 나의 생각, 나의 존재, 나의 의견이나 감상따윈 모두 오류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하반신에 팬티의 천으로 야영텐트를 친 것 역시 오류의 범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가지 새삼 깨달았다.
빛 따윈,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정보반사 해 던져주는 ‘오물’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진정한 광채는 본질의 윤곽인 것을… 본질의 윤곽 만을 오롯이 담은 실체라는 것을…
뿔 달린 밀항자, XX해적… 나체의 내 여동생을 갑판 위에 두고 나는 꿀꺽 삼키고야 말았다. 고체 양산화된 뉴 타입의 소화액을. 두 눈을 가늘게 빛내며 역시 가늘게 양 귓볼로 향하는 그녀의 입술. 그 가장자리의 어느 지점과 가늘게 이어진, 무색의 끈기 있는 내 침을 말이다.
…악의 권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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